매천 황현 선생 4부, 시대상 비판 상소문 언사소 올려

양봉규 기자 / 기사승인 : 2021-02-23 18:53:57
  • -
  • +
  • 인쇄
대월헌절필첩(待月軒節筆帖)
대월헌절필첩(待月軒節筆帖)

[뉴스써치] 매천 선생은 당시 시대상을 신란하게 비판한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다. 그 글자수만도 1만3000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구구절절(句句節節)한 내용이다.


어진 사람은 친근히 하고, 간악(奸惡)한 사람은 멀리 해야 하며, 은(殷)나라 고종(高宗)이나 주(周)나라 선왕(宣王)같은 중흥군주와 가히 짝을 지어 아름다움을 이룩할 것이어늘, 돌아보건데 무엇이 꺼려서 하지 않느냐고 간언(諫言)하며 다음의 아홉가지를 당장 실행하라고 다그친다.


여기에 선생의 굳은 의지와 각오가 담겨있다.


첫째, 언로(言路)를 열어라.


둘째, 법령(法令)을 미덥게 하여 군중의 의지를 정하라.


셋째, 형장(刑章)을 엄숙히 하여 강기(綱紀)를 진작하라.


넷째, 절약(節約)과 검소(儉素)를 숭상하여 재원을 부유하게 하라.


다섯째, 척완(戚畹)을 몰아내서 인민의 공분(公憤)을 풀어라.


여섯째, 보거(保擧)를 엄정히 하여 인재와 현인을 나와 들게 하라.


일곱째, 한 직위(職位)에 오래있게 하여 치적의 효과를 책(責)하라.


여덟째, 군제(軍制)를 변경하여 난명(亂命)을 소멸케 하라


아홉째, 토지장부(土地帳簿)를 사핵(査覈)하여 세금을 늘려서 국가예산을 넉넉하게 하라.


매천 선생의 언사소(言事疏)는 수십번을 읽어봐도 지당(至當)한 말이고 100여년이 지난 요즘의 위정자(爲政者)들도 꼭 새겨들어야 할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명 상소문이다.


당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 등이 울분(鬱憤)을 참지 못하고 을사오적(乙巳五敵)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유배를 가거나 구금(拘禁)을 당하자 이에 분개(憤慨)하여 자결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전 주미공사 민영환(前 駐美公使 閔泳煥), 전 좌의정 조병세(前 左議政 曺秉世), 전 대사헌 송병선(前 大司憲 宋秉璿), 전 이조참판 홍만식(前 吏曹參判 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學部主事 李相喆) 등이 연이어 자결하자 매천 선생이 이를 마음 아파하며 오애시(五哀詩)를 손수 써서 바쳤다.


전주 매천시집(箋註 梅泉詩集) 표지
전주 매천시집(箋註 梅泉詩集) 표지

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주인공인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 선생이 후에 경남일보 주필이던 시절 신문(1910.10.11자)에 황현 선생의 절명시를 실으므로써 경남일보 필화(筆禍)사건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보듯 매천 선생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어떠했는지 가늠해 볼수 있다.


선생은 구안실이나 월곡에서 칩거(蟄居)할 때도 당대의 이름 있는 학자들을 만나 나라 걱정과 함께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석정 이정직, 해학 이기, 홍암 나철 뿐만 아니라 운조루(雲鳥樓) 5대주인 이산 유제양(二山 柳濟陽1846~1922 ) 등 이름 있는 문우들과 문하생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구례 출신만해도 광의면(光義面)지천리(芝川里) 천변(川邊)마을 유당 윤종균(酉堂 尹鍾均1861~1941), 남산 왕재소(藍山 王在沼1871~1943), 왕석보 선생의 손자 운초 왕수환(雲樵 王粹煥1865~1926), 옥천 왕경환(玉泉 王京煥1873~1943) 형제와 지하(芝下)마을 종산 양현룡(鍾山 梁顯龍1876~1936), 지촌 권봉수(芝村 權鳳洙1872~1943), 석하 권홍수(石荷 權鴻洙1882~1972) 형제, 석농 권석호(石濃 權錫祜), 지상(芝上)마을 우천 박해룡(愚川 朴海龍1885~1959), 토지(土旨)의 묘원 허규(卯園 許奎1861~1931), 간전 마을 취헌 오병희(翠軒 吳秉熙1871~1940), 문척 토금(土金)마을 오봉 김택진(五峯 金澤珍 1879 ~1937), 용방(龍方)마을 백촌 이병호(白村 李炳浩1870~1943) 선생 등이 문하에 있었고 이밖에도 수많은 제자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당시 호남학파의 거두 천사 왕석보(川社 王錫輔)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선생 문인(門人)들이 학맥(學脈)을 이뤘고 결국 구례지역을 중심으로 매천시파(梅泉詩派)가 탄생하게 되었다.


매천시파는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스승 매천의 강직(剛直)한 정신을 본받아 민족의식 고취(民族義識 鼓吹)와 민족주체성 확립(民族主體性 確立) 등 신념이 강한 문하생들이 주춧돌이 되어 1916년 운치 좋은 토지 용두동 섬진강가에 용호정(龍湖亭)을 지어놓고 용호정시계(龍湖亭詩契)를 결성하였다.


소천 왕사찬(小川 王師瓚), 이산 유제양( 二山 柳濟陽), 유당 윤종균(酉堂 尹鍾均), 종산 양현룡(鍾山 梁顯龍), 묘원 허규(卯園 許奎), 오봉정사(五鳳精舍) 주인 경당 임현주(警堂 林顯周1858~1934) 선생 등 구례 1세대 문인들과 소요음영( 逍遙吟詠)하였다. 또한 봉성음사(鳳城吟社), 난죽사(蘭竹社) 등 시계(詩契)를 만들어 활발히 활동하였다.


용호정시계는 침불천시계(沈不川時契), 방호시사(方壺詩社), 반천시사(蟠川詩社)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항일의식 고취를 위한 위장수단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갔다.


백촌 이병호(白村 李炳浩), 취헌 오병희(翠軒 吳秉熙)를 필두로 오두선(吳斗善), 윤행덕(尹行德), 마서하(馬瑞河)외 72인의 참여하에 용호정(龍湖亭)을 지었는데 이 정자(亭子)는 당시 조선조 구례현 관아(官衙)건물인 고각루(敲角樓)를 사서 이건(移建)한 것이다.


용호정에는 유명 서예가 주원형(朱源榮) 선생과 해강 김규진(海江 金奎鎭) 선생이 서액(書額)한 현판(懸板)이 걸려있다. (계속)



[저작권자ⓒ 뉴스써치.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양봉규 기자
양봉규 기자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