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 선생 1부, 절개와 지조로 우뚝 선 선비

양봉규 기자 / 기사승인 : 2021-03-01 12: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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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 선생 영정(影幀). 이 영정은 왕실화가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1848~1941)이 그렸다. 
매천 황현 선생 영정(影幀). 이 영정은 왕실화가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1848~1941)이 그렸다.

[뉴스써치] 매천(梅泉) 황현(黃鉉,1855~1910). 선생의 자(字)는 운경(雲卿)이요, 호(號)는 매천(梅泉)이다.


황현 선생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절명시(絶命詩)이다.


선생은 구한말 우국지사로서 강직하고 굳은 절개(節介)와 지조(志操)로 우뚝선 선비요 학자로서 도처에 명성이 자자(藉藉)한 분이었다.


매천 선생의 출생지는 광양(光陽)이지만 학문과 정신적 고향은 구례(求禮)이다.


매천 선생이 광양과 구례를 오가면서 산자수명(山紫秀明)하고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한 지리산(智異山)의 높은 정기(正氣)와 흰구름이 두둥실 산허리를 감싸는 운치좋은 백운산(白雲山)의 기상(氣像)을 듬뿍 받었고, 지리산 자락을 끼고 돌며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蟾津江)을 건너며 한층 기개를 키웠을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이 노골화되고, 안으로는 개화파(開化派)와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이전투구가 계속되었다.


각 파벌간 싸움을 하는 동안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였다.


이런 혼란속에 끝내 치욕(恥辱)적인 경술국치(庚戌國恥1910.8.29)로 한일합병이 되자 망국의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1910년 9월7일 자결(自決)한 황현은 불의를 보고 참지못하는 대쪽같은 선비였다.


매천 선생은 나라가 망했는데도 오백년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버리고 목숨을 같이하는 선비하나 없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비참한지 한탄하며 그 유명한 ‘절명시’ 4수(四首)를 남기고 구례(求禮) 광의면(光義面) 수월리(水月里) 월곡(月谷)마을 대월헌(待月軒)에서 자결(自決)하였다.


죽음으로써 자신의 굳은 결의를 나타낸 우국지사(憂國之士)인 선생이 남기고간 발자취가 너무 크고 고귀(高貴)해서 매천 선생의 곧은 생애(生涯)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기로 한다.


매천 선생이 20대부터 순절(殉節)하기까지 그의 삶은 근대화를 알리는 개항(開港1876)기를 시작으로 임오군란(壬午軍亂1882), 갑신정변(甲辛政變1884), 청일전쟁(淸日戰爭1894)을 거쳐 조선이 멸망하는 과정을 직접 목도(目睹) 하였다.


매천은 혼란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2000여편의 시(詩)를 남긴 문인(文人)이요 사상가(思想 家)로서 그는 곧은 지사의 풍모(風貌)를 지녔다.


비록 매천은 초야(草野)의 선비였지만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황현선생 위패를 모신 월곡리의 매천사(梅泉祠)
매천 황현 선생 위패를 모신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 매천사(梅泉祠)

매천 선생은 세종때의 명재상(名宰相) 황희(黃喜) 정승의 후손으로서, 의병장이었던 10대조 황진(黃進)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무민공(武愍公)이요, 8대조 황위(黃暐)도 병자호란때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지낸 분이다.


이런 명문가의 후손이었지만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 가세가 기울어 조부 황직(黃樴)이 광양 서석촌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매천 선생은 부친 황시묵(黃時默)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총명(聰明)하고 영민(英敏)하여 시와 문장에 뛰어난 천재로 소문이 났었기에 부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7세에 순천과 광주의 백일장에 나가 이름을 떨치는등 일찍부터 재능이 남달라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매천은 슬하에 아들 암현(巖顯)과 위현(渭顯), 그리고 딸 하나를 두었다.


1960년대 구례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던 황봉주(黃鳳周) 선생이 황현 선생 손자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중학교 3학년 국사(國史)책 마지막 부분에 우국지사 매천선생의 절절한 '절명시' 내용이 실려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선생은 학(學), 의(義), 절(節)을 겸비한 구한 말의 선비요 우국지사(憂國之士), 애국지사(愛國之士)요, 문인(文人), 시인(詩人), 문장가(文章 家), 역사가(歷史 家), 사상가(思想 家)로서 유학(儒學), 주자학(朱子學) , 양명학(陽明學), 실학(實學), 성리학(性理學), 경학(經學)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매천은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기까지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과 교유하며 폭넓은 학문을 쌓았고 올곧은 삶을 살면서 지식인으로서 도리를 다하려 노력했다.


때문에 매천은 어떤 벼슬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후학을 기르며 매천야록 등 동시대를 꿰뚫는 저술활동으로 명저(名著)를 남긴 문장가이기도 하다.


조정대신(朝廷大臣)들의 끝없는 이전투구(泥田鬪狗)로 나라가 흔들리고 흉년에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수탈(收奪)로 민심이 흉흉해져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일어나는 등 나라는 혼란스러웠다.


마침내 침략자 일본이 국권을 빼앗자 매천은 지식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을 자책(自責)하며 '절명시' 4수를 써놓고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우국지사다운 결기(結氣)를 보여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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